세계시민과 제국주의

민족이나 국가의 개념을 넘어서 ‘세계인’ 혹은 ‘세계시민’을 추구했던 인류의 과거가 자크 아탈리의 책 <세계는 누가 지배할 것인가>의 앞부분을 일부 발췌합니다.

지금으로부터 2,500년 전부터 인류는 국가와 민족을 넘는 ‘세계시민’의 개념을 이야기했고, 기원전부터 서기 2세기경에는 알려진 세계의 대부분의 지역에서 하나의 시민권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나오기도 하였습니다.

이전부터 자크 아탈리가 주장하던 국가와 민족으로부터 벗어나 여러 언어를 구사하고 다양한 사람들과 교류하며 자유롭게 세계를 이동하는 구상이 얼마나 오래된 것인지 알 수 있는 재미있는 부분이기에 아직 책을 다 읽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발췌하여 소개합니다.

(전략)

기원전 5세기 아테네에서는 변론술을 가르치던 소피스트들이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그리스인과 비그리스인을 구분하지 않았다. 특히 프로타고라서, 고르기아스, 히피아스는 여행을 많이 다녔는데 그중에서 프로타고라스는 페리클레스의 부탁으루 투리오이라는 그리스 식민지의 법제도를 마련했다. (중략)그들은 모든 인간이 같은 종족이라고 믿었다. 그리스인이라는 것은 특권이 아니었다. (중략) 플라톤의 <프로타고라스>에서는 소크라테스에게 답하는 히피아스가 자문화중심주의에 반대했다. 그는 보편적 도덕규범이 개별적 법과 관례를 초월하며, 자발적으로 우러나온 우애가 변치 않을 때 인류가 하나로 통합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중략) 히피아스는 ‘아시아와 유럽은 대서양의 두 자매’라고 확신하기도 했다. 동시대 철학자였던 안티폰도 그리스인과 외국인(야만인_을 구분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역시 소피스트였던 알키다마스는 “신은 모든 인간을 평동하게 태어나게 했다. 자연은 인간을 노예로 삼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또 다른 소피스트 에라토스테네스 역시 그리스인과 야만인이 “보편적인 사랑의 성배처럼 서로 섞여야 한다.”고 했다.
100년이 흐른 기원전 350년경 키니코스학파의 대표적 인물인 디오게네스는 ‘세계시민(코즈모폴리턴)’이라는 핵심적인 개념을 정립했다. 한참 뒤에나 만들어진 ‘세계주의’라는 말은 디오게네스에게 진정한 인류의 연대를 상징하는 것이었고, 소피스트들이 생각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민족주의에 대한 거부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중략)

이때 아테네에서 그리스 철학의 거장이 또 한 명 등장했다. 이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제자였던 아리스토텔레스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소피스트들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들과 마찬가지로 그리스인이든 아니든 모든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며 분절된 언어를 사용하는 유일한 동물이라고 말했다.

세계시민의 보편성 개념은 머지않아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 한 명이 사용하게 된다. 그는 세계의 황제임을 스스로 천명했고 역사상 최초로 정부를 구상하고 만들어 세 대륙을 다스렸다. 기원전 336년 갓 스무 살에 소국 마케도니아와 그리스 도시들과의 애매한 연합 관계를 유산으로 물려받은 알렉산드로스는 알려진 세계를 모두 다스리길 갈망했다. 그는 역사를 통틀어 열 손가락 안에 꼽힐 만큼 스케일이 큰, 흔치 않은 인물이었다. 스스로 신이라 자처하고 아킬레스와 헤라클레스의 후손이라 했던 알렉산드로스는 그리스 전체를 단숨에 정복하고 소아시아, 레반트, 이집트까지 진출했다. 그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유대, 사마리아, 페르시아 제국, 동이란, 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 힌두쿠시를 점령했으며 스키타이 제국과 아랄 해 남부의 강력한 왕국 호라즘까지 연이어 쓸어버렸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제국의 주민들에게 여러 언어를 배우라고 장려했고 도시를 세워(그 중 7개 도시가 그의 이름을 땄다) 그곳에서 의복과 궁중 예절을 현지화한 그리스인과 언어와 행동을 그리스화한 원주민에게 똑같이 시민권을 부여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페르시아제국 지방 태수의 딸인 ‘동양의 진주’ 록사나와 혼인했다. 기원전 324년에는 수사에서 페르시아 왕가의 딸 두 명과 다시 결혼했고 그 혼인에서 장녀 바르시네를 얻었다. 그의 휘하에 있던 장교 90명도 페르시아나 메디아 여성과 혼인했고 그리스 군인 1만 명도 페르시아 여성과 결혼했다. 그런 가정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제국의 새로운 지도층과 군대의 지휘관이 되었다.
플루타르코스는 이를 가리켜 ‘그는 전 세계 모든 사람들을 단지 하나에 넣고 섞는 듯했다. 그는 모두에게 지구를 조국처럼 생각하라고 명했다’고 표현했다. 하지만 마케도니아인들은 체제의 ‘동양화’를 껄끄럽게 생각했고 군대는 반항하기 시작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기원전 323년 서른두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성인이 된 후계자는 없었다. 그의 배다른 형제였던 필립 아르히데우스는 제국의 분열과 전직 장군들의 알력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알렉산드로스가 엮어주었던 결혼은 무너지기 시작했고 제국은 역사의 뒤안길로 영영 사라지고 말았다.
그로부터 반세기가 지난 기원전 280년경 키티온의 제논이 스토아 학파를 창시했다.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온 저서는 없지만 제논은 모든 인간이 동일한 법의 지배를 받는다고 역설했다. 인간은 평동하며 누구나 로고스(보편적 이성)를 가지고 있어서 우주 질서 속에 동등한 자리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플루타르코스는 후에 이렇게 적었다.
“제논은 추앙받는 ‘공화국’에 대해 썼다. 그 공화국에서는 사람들이 각자의 법을 가진 도시와 민족으로 나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모든 인간이 한 나라 사람이며, 그들에게는 공동의 법으로 단합된 소떼처럼 단 하나의 삶과 단 하나의 사물의 질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중략 – 이런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세계시민’의 노력은 로마 제국으로 이어진다.)

로마는 원로원이 관할하는 ‘원로원 속주’와 국격지대의 ‘황제 속주’로 나뉘었다. 총독이 다스리는 원로원 속주는 시민 행정을 실시했다. 지방의 엘리트 계층은 로마로 몰려들었고 도시는 상품뿐만 아니라 시인, 원로원, 나중에는 황제까지 배출했다. 안토니누스 왕조는 이베리아 반도 출신이었고 그 뒤를 이은 세베루스 왕조는 북아프리카 출신이었다. 로마제국의 식민지에서는 지역의 신들이 로마의 판테온에 입성했다. 세계시민을 주창하는 스토아학파의 정신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에픽테토스, 세네카 등 많은 철학자들에 의해 확산되었다. 세네카는 ‘내 조국은 세계이고, 내 보호자는 신들이다. 신들은 나를 굽어 살피고 내 행동과 말을 검열한다’고 했다. 로마 시민권도 확대되어 2세기 그리스의 변론가 아렐리우스 아리스티데스는 로마 시민이 된 뒤 <로마에 바치는 송가>에서 노래했다.

“자비로운 그대들은 시민권을 풍족히 나눠주었소. 그대들은 제국의 주민 모두에게 자격을 갖춰주려 했소. 로마인의 이름이 도시가 아니라 하나의 민족을 가리키는 이름으로 만들었소.”
212년 카라칼라 황제는 ‘신에게 은혜를 갚고 시비와 항의’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 자유인 전원에게 시민권을 부여했다. 이는 무엇보다 납세자의 수를 크게 늘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200년 정도 흐른 뒤 알렉산드리아의 시인 클라우디아누스는 호노리우스 황제 통치 시절 로마에서 한 장관의 후원을 받고 있었다. 그도 로마의 호의에 경의를 표했다.
“로마는 지배자가 아닌 어머니로서 정복한 자들을 품에 안은 유일한 곳이다. 로마는 그들을 길들여 시민으로 만들었고 신성한 관계를 맺어 먼 민족들을 통합했다. 로마가 평화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에 우리에게 모든 곳이 조국이 되었고 하나의 나라가 되었다. 로마의 지배는 끝이 없을 것이다.”
자기들이 영원한 세계정부라고 믿었으니, 모든 제국에서 나타나는 전형적인 증상이 아닐 수 없다.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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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것은 국가와 민족 너머를 지향했던 이들이 주로 제국이었다는 점, 그들은 이민에 관대했고 시민권을 뿌렸으며, 그로인하여 이민자들이 차세대 리더가 되었다는 점, 그리고 이들이 지향하는 체제가 ‘공화국’의 형태를 띠고 있다는 점 등은 현대의 제국에도 무척 많은 시사점을 줍니다. 그리고 3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인류를 지배하는 본질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는 생각도 듭니다. 이 책의 뒷부분엔 또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 무척 기대됩니다. 다 읽으면 리뷰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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