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의 사투가 시작된다 – 괴물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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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의 포스터는 여러 버전이 있는데, 나는 현서를 구하려는 가족의 모습이 나온 이 포스터가 가장 좋다.

 

아침 출근길에 커다란 일본 활(화살 쏘는 바로 그거 맞슴돠)을 들고가는 처자를 보다가 문득 봉준호 감독의 영화 괴물이 떠올랐다. 현서(고아성)의 이모 선주(배두나)가 양궁선수이기 때문이었다. 활쏘는 여자에서 무심코 시작된 연상은 이내 끔찍한 전개를 맞이하게 되었다.

 

딸이 괴물에게 잡혀가서 죽은 줄 알았는데, 딸에게서 전화가 걸려옵니다. 그 때부터 나와 가족들은 딸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합니다. 그런데 이놈의 정부는 딸을 찾아주는 게 아니라 있지도 않은 괴물 이야기를 한다며 나를 미친놈 취급하고,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다며 멀쩡한 내 두개골을 쪼개서 뇌수술을 하려고 합니다. 심지어 가족 전부가 현상수배가 걸립니다. 구해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내 딸을 찾아야 하는데,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나까지 죽이려고 합니다.

 

괴물의 이야기를 주인공 강두(송강호)의 입장에서 적은 글이다. 그렇다. 2007년에 개봉된 영화는 2014년 세월호 사건과 동일한 구성을 가지고 있다.

 

현서(고아성)를 잃은 슬픔에 쌓여있던 가족은, 뒤늦게 현서가 아직 살아있다는 것을 알고 온갖 방해를 뚫고 현서를 구하러 간다. 결국 괴물을 해치우는 것은 미군도 한국 정부도 아닌 현서를 구하려는 현서 가족. 현서 가족에게 닥친 위협은 현서를 잡아간 괴물도 있었지만, 괴물의 등장 사실을 은폐하기 위한 미군과 그에 동조한 한국 정부도 있었다. 영화에서는 미군은 괴물의 존재를 숨기고 바이러스가 퍼진 것이라고 날조하기 위하여 온갖 악행을 저지르는데, 극초반 한강변에서 시민을 지키기 위해 괴물에 맞서 싸우다 사망한 미군 병사를 영웅이 아니라 바이러스 보균자로 만든다거나, 바이러스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하여 다짜고짜 강두의 두개골을 열어 뇌수술을 하려고 하는 등, 영화에서 가장 큰 갈등 요소를 만들고 있다. (이 영화의 놀라운 점 중 하나는 여러 레이어의 갈등 요소가 촘촘하게 엮여 있다는 점인데 현서를 데려간 괴물, 사실을 은폐하려는 미군, 가족 개개인간의 애증- 현서의 장례식장에서 박해일이 송강호를 발로 차며 욕하는 것과 같은 장면이 보여주듯- 이 잘 짜여진 씨줄과 날줄처럼 촘촘하다)

 

극장에서 딱 한 번 본 이후, 마음이 너무 무거워 블루레이를 사놓고 한 번도 보지 않았던 그 무거운 영화가, 출근길에 문득 지금 대한민국의 현실과 너무 비슷하여 소름끼쳤다. 영화에서는 (차마 한국 정부가 한국 시민에게 그러랴 싶어서) 미군이 시민에게 해를 끼치는 존재로 그려졌는데, 이 영화가 세월호 사건 이후에 제작되었다면, 영화에서 괴물의 존재를 은폐하고 시민의 생명을 방치하는 나쁜 역할은 한국 정부가 되었을 것 같다. 그때만해도 자국 정부가 자국민을 살인(에 가까운 행위를) 하는 건 상상하기 힘들었지만 지금은 현실이 되어 버렸으니까. 딸을 잃어 슬퍼하는 강두를 위로하기는 커녕 강제로 뇌수술을 시도하는 미군의 모습이나, 휴대폰 위치 추척을 위해 잠입한 남일(박해일)을 잡으려고 찾아온 형사들의 모습에서 세월호 유가족들을 대하는 한국 정부와 일부 사람들이 오버랩된다. 내 딸, 손녀, 조카가 괴물에 잡혀갔는데 미군은 뇌수술을 하려고 잡아가고 정부는 방해하고 가족 전부는 현상수배범이 되고, 그러는 와중에도 내 딸, 손녀, 조카는 구원을 기다리고 있고…

괴물의 현실 비틀기가 풍자라고 생각했지, 그게 ‘현실’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는데, 사실은 우리는 자신의 가족을 지키 위해서는 뇌수술 당하고 현상수배 당하면서도 스스로 해내면 안되는 시대에 살고 있었던 것이었다.

앞으로도 오랫동안 영화 괴물은 보지 못할 것 같다.

 

 

사족. 일본에 왔을 때 활을 들고 다니는 여고생들이 굉장히 많아서 살짝 놀랬는데, 애니메이션 ‘이누야사’를 보면 고교생인 여주인공 카고메가 활을 쏘는 장면이 나온다. 아, 뭐 이게 그리 드문 건 아닌 건가… 싶기도 했다. 저 활이 시위를 매지 않으면 2미터 정도 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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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시부야역에서 활을 들고 다니는 여고생은 카고메처럼 생기진 않았다.

 

사족2. (페이스북 댓글 쓰다 생각난 것 추가) 그러고보면 봉준호 감독이 예언자다. 봉준호 감독의 다른 영화들도 다시 봐야할 것 같다. 설국열차 아직 못봤는데, 다음엔 그게 현실이 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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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인생을 바꾸는 가장 좋은 방법

지리멸렬한 인생을 바꾸기 위한 여러 시도에도 불구하고, 더 나은 인생을 살기 위해 노력하려고 마음 먹는 노력조차 하지 못하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던 어제, 일본을 찾아온 함께 일했던 동료와 만난 자리에서 인생을 조금 더 재미있게 보내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불쑥 이런 이야기를 꺼냈다.

“글 써보는 건 어때요? 요즘 블로그 업데이트도 거의 없던데, 글쓰기는 적은 비용으로 인생을 바꿀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예요”

어떻게든 블로그 갱신해보겠다 마음먹고 새로운 블로그를 개설해놓고도 놀리고 있는 내가 할 말이 아니라는 생각에, 말하면서도 아차 싶었지만 이미 뱉어버린 말 어쩌겠냐 싶었다.

 

전부터 줄곧 생각해왔던 것이지만, 글쓰기는, 여러 의미에서 자신의 인생을 바꾸는 첫 발이 되는 것 같다. 우선 글쓰기는 자신이 가진 생각을 정리하는 훈련이 되기도 한다. 머리속에 애매하게 떠돌던 많은 것들이 서론-본론-결론의 구조를 갖춘 글이 되며 나름대로의 체계를 가지고 조직화되는 과정은, 내가 더 나은 인간이 되기 위한 기본적인 틀을 갖게 해준다. 또한 완성된 글을 이리저리 다듬는 시간은 객관이라는 껍질을 쓰고 내 안에서 더 단단해지는 온갖 종류의 편견을 찾아내는 시간이 되기도 한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 나같은 평범한 인간에게는 내가 쓴 글을 다시 읽고 퇴고하는 시간은 내 안의 편견과 나르시시즘을 새삼 발견하게 되는 시간이기도 하다. 글의 주제를 명확히 하며 전체의 줄거리를 다듬고, 주어와 서술어를 맞추고, 온갖 종류의 부사를 떼어내어 글을 깔끔하게 만드는 과정은 내 안의 추한 나를 발견하는 과정이기도 하지만 이 과정이 끝나고 말끔해진 글을 읽어보면 비록 잠시지만 내가 더 나은 인간이 된 것같은 만족감을 느낄 수도 있다. 이런 만족감은 내 생각을 정리하고 더 나은 인간이 되기 위한 틀을 얻는 것만큼이나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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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젤 워싱턴과 스파이크 리의 영화 mo’ better blues. 블루스가 인생이라는 점에서 이 영화는 더 나은 인생의 역설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우리들 대부분은 삶을 버텨내는 것조차 버거운 하루하루를 살아가기에 깊은 생각을 할 여유를 갖는 다는 게 어려운 일이다. 다행이도 글쓰기는 이럴 경우에도 도움이 되기도 한다. 전문적으로 쓰는 글이 아닌 일기 수준의 글쓰기는 대개의 경우 생각을 정리할 뿐 아니라 새로운 생각을 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 천재성 넘치는 움베르토 에코마저도 그의 워드프로세서(정확하게는 그의 페르소나인 야코포 벨보의 워드프로세서) ‘아불라피아’를 가리키며 “내 머리가 생각을 하기도 전에 손가락이 글을 작성한다”라며 예찬하였으니, 에코보다 평범한 내 두뇌보다는 얼마나 빠르겠나 싶다.(아불라피아에 대한 부분은 이십년 전에 읽은 책을 기억에 의존해서 쓴 부분이라 ‘생각을 채 마치기도 전에 글이 작성된다’라는 식의 내용일 수도 있다) 일단 하얀 백지를 열어두면, 뭘 쓰지, 라는 막막함이 전전두엽과 단절된 손가락의 움직임에 의해 고딕의 한글로 뒤바뀐다. 이 글이 잘 쓴 글이냐는 생각하지 말자. 어차피 우리의 기준에 잘 쓴 글을 우리가 직접 쓰는 일은 평생 한 번 올까 말까 한 일일테니. 일단은 서론-본론-결론의 구조를 잘 맞추고, 내가 쓰는 주장 중 근거가 될만한 것들을 찾는 것만으로도 그럭저럭 읽을만한 글을 쓸 수 있다. 게다가 어렵고 귀찮게 느껴지는 글쓰기도 계속 하다 보면 점점 나아지기도 할테니 이 또한 기쁜 일 중 하나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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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불라피아는 13세기의 실존인물 아브라함 아불라피아에서 따온 이름이다.
– Abraham Abulafia’s “Light of the Intellect” 1285, Vat. ebr. 597 leaf 113 recto

 

글쓰기는 내 안의 세계뿐 아니라 내 밖의 세계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우리가 쓴 글이 일관된 분야의 내용을 담고 있고 그것이 어떤 이들에게 도움이 된다면, 내 안에서 출발한 글쓰기는 내 밖의 다른이들에게서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기도 한다. 블로그를 통해 새로운 사람을 만나거나, 새로운 일을 하게 되거나, 책을 출판하는 등의 사례는 우리 주변에서도 흔히 볼 수 있을만큼 드물지 않은 일이다. (어제 만난 동료도 양질의 컨텐츠를 담은 여행 블로그를 계기로 여행 관련 책을 쓰기도 했다) 특정한 분야에 대한 전문적인 글을 계속 쓴다면 내가 찾아가지 않고도 영업이 되기도 한다. 짧은 구글링으로도 블로그 등에 글을 쓰면 좋은 이유를 주장하는 사람들을 수없이 발견할 수 있다. (생각해보니 지금 내가 쓰는 글도 거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구나. 그냥 좋은 글 찾아서 번역이나 할 걸)

 

이 글의 결론은, 이 글의 제목과 동일한데, 당장 이삼일에 한두 시간 투자하는 것으로 내 인생을 바꿀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생각하면, 의욕없고 귀찮고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어도 일단 해보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이야기다. 참고로 이 글 역시 그런 지리멸렬의 틈을 뚫고 겨우 작성되었고, 어쩌면 나는 이번 주 안에 하나의 글을 더 쓸지도 모르겠다는 희망적인 설레발을 떨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