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기가 너무 싫어서 쓰는 잡담 글.
내가 드디어 미친건지, 금요일 밤에 도착한 프라모델을 토요일에 조립했다.
프라모델은 사는 거지 조립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마냥, 사서 쌓아두고 있던 1인으로서, 도착한 신상을 바로 조립하는 게 몇 년만인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다. (참고로 프라모델을 쌓아두는 것에 대해서는 정식 용어도 있다. 프라탑(나무위키주의), 참고로 내가 노는 카페에는 프라’탑’이 아니라 프라’벽’이나 프라’방’을 만드는 경우도 무척 흔하다)
여하간 그렇게 만든 것이 바로 이 반다이 1/35 배트모빌 – 1989년 팀 버튼/마이클 키튼 버전이다.
배트모빌이야 항상 좋지만, 그 중에서도 1989년 버전의 배트모빌 (그리고 영화 배트맨)은 나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기도 하다.
20세기 영화잡지들은 부록으로 큰 포스터를 주었다. 아마도 일본 잡지들의 영향이라고 생각되는데, 1989년은 내가 잡지 부록으로 나오는 포스터나 브로마이드에 눈을 뜨게 된 해였다.
1989년 7월 영화잡지 스크린의 부록은 앞면은 글로리아 입, 뒷면은 이미연이 나온 커다란 브로마이드였다. (사람에 따라서 앞면과 뒷면의 인식이 다를 수 있지만, 나에게 앞면은 글로리아 입이었다)
친구네 집에 놀러갔다가 우연히 보게 된 이 브로마이드가 너무 가지고 싶어서 나도 스크린을 샀다. 당시는 이미 8월호가 서점에서 팔리고 있던 때였는데, 마침 동네 서점에 재고가 남아 있어서 쉽게 구할 수가 있었다.
당시의 나는 나름 가난했어서 (그 이후 10여년간 그 가난함의 정도는 나날이 갱신되어 쌀을 못사는 지경까지 간다) 비디오 데크는 언감생심 꿈도 못꾸는 처지였을 뿐 아니라,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런 나에게 영화 잡지는 새로운 세계를 열어 주었다.
‘스크린’을 보던 나는 ‘로드쇼’를 샀고, 로드쇼에서 신들린 글을 쓰던 정성일과 구회영은 몇 년 뒤 ‘키노’를 창간하고, 나는 영화를 전공하겠다며 예술 대학에 입학하게 된다. 정성일은 이후 다들 아시다시피 정은임의 영화음악을 비롯하여 여러 매체에서 활약하게 되고, ‘영화에 대해 알고 싶은 두 세가지 것들’을 쓰던 구회영은 키노에서 ‘도씨에’를 쓴 이후, ‘김홍준’이라는 본명으로 데뷔작 ‘장미빛 인생’과 인디 뮤지션 ‘윤도현’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정글 스토리'(아마 다들 신해철의 OST로 기억하실 것 같긴 하지만)를 찍게 된다.
정성일은 정성일이고, 김홍준은 빔 벤더스(베를린 천사의 시), 카메론 크로우(제리 맥과이어, 올모스트 페이모스)와 함께 나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영화 감독이다.
여하간 그런 지리멸렬한 10대 중반부터 20세기가 끝나던 20대 후반까지의 시작이 되는 지점이 바로, 1989년 친구네 집에서 우연히 본 글로리아 입 포스터였다. 그리고 그 해 여름이 바로 팀 버튼의 배트맨이 세상에 나온 때였다.
오랜만의 프라모델 조립, 재밌구나.
(옛날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끝나기……)